

전근대 우리나라의 접착제,
왕의 초상화와 관의 채색에는 최상품의 아교와 녹각교를 사용했다!
교(膠)는 동물의 가죽, 힘줄, 창자, 뼈 등을 물과 함께 끓여서 추출한 천연 단백질이며, 전근대 동아시아에서는 주로 접착제 를 지칭하는 용어의 하나에 해당했다. 교에 관한 이른 시기의 기록물 가운데 하나인 「周禮」 考工記에서도 “膠는 붙이기 위한 것이다”라고 했으며, 후한시대 문헌인 「설문해자」, 「이아」 등에서도 동일 의미로 풀이했다. 주로 짐승의 가죽이나 물고기의 껍질 등을 이용했기 때문에 한글로는 ‘가죽의 풀’을 뜻하는 ‘갓블’, ‘갓플’, ‘갓풀’등으로 명명했다. 일본에서는 삶다(煮)에 해당 하는 ‘に’와 가죽(皮)에 해당하는 ‘かわ’를 합성하여 ‘니가와’라는 명칭을, 서양에서는 ‘glues’, ‘glue’, ‘gelatin’ 등의 명칭을 사용 했다. 대개 원 재료를 끓여 교질을 추출한 후 여과, 농축, 응고, 건조 등의 과정을 거쳐 제조했다.
「釋譜詳節」 (1447) 「訓蒙字會」 (1527) 「類合」 (1543 이전) 方藥合編」 (1885)
화학적으로 교는 콜라겐(Collagen, C102H149O38N31)에 해당하며, 여기에 글리신(Glycine), 프롤린(Proline), 하이드록시 프롤린(Hydroxylysine) 등 다양한 아미노산을 함유했다. 이들 아미노산은 동물마다 그 구성비가 다르며, 따라서 각각 물성을 달리하는 요인으로 기능했다. 아울러 단백질을 주요 성분으로 하기 때문에 식용 및 약용으로도 사용했다.
이와 같은 동물성 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선사시대부터 근대까지 제조, 사용되었으며, 주로 내륙아시아와 서아시아 등이 주요 기원지로 이해되고 있다. 사해 근처 나할 메마르 동굴 출토 유물과 고대 이집트 유적의 회화 및 공예품 등에 사용된 교 의 경우 각각 기원전 6000년, 기원전 2500년 경에 해당한다. 그리스지역의 경우도 우피교와 어교 제조에 관한 기록이 아리 스토텔레스(384~322 B.C.)의 「동물사」에 언급되며, 로마 학자 플리니우스(23-79)의 「박물지」에도 어교의 제조 및 사용법에 관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동아시아에서는 현존 자료에 근거할 경우 중국이 가장 이른 시기에 출현하며, 춘추시대와 전국 시대 저작으로 간주되는 「五十二病方」과 「周禮」 등은 가장 오랜 교 관련 기록물에 해당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구려 고분벽 화에 사용된 구교가 가장 이른 제조 용례에 해당한다.
동물성 교는 지역별로 다양하게 출현했다. 유럽에서는 그리스시대 우교, 어교의 출현과 더불어 이후 토교, 녹교, 철갑상어 부레교, 고래꼬리교 등의 제조로 확대되었으며, 흑해 지역에서는 철갑상어교, 북극 인디언 거주 지역에서는 연어, 송어 등의 알을111이용한 어란교, 연해주 지역에서는 해삼교 등을 생산했다. 중국의 경우 전국시대 마교, 우교, 녹각교, 서교(犀膠), 어교 등의111제조를 시작으로 이후 저교(猪膠), 구교(狗膠), 서교(鼠膠), 타교(駝膠), 여교(驢膠), 나교(騾膠), 미록교(糜鹿膠) 등 다양 한 종류의 교를 생산했다.
중국의 경우 대개 동물 이름을 앞에 붙이는 명명법을 선호했는데 어교(魚膠)와 같이 물고기 전체를 강조하여 범칭으로 명 명한 경우, 표교(鰾膠) 및 녹각교(鹿角膠) 등과 같이 사용 부위인 부레(鰾) 및 녹각을 강조하여 명명한 경우, 황명교(黃明膠), 청교(淸膠), 백교(白膠) 등과 같이 교의 색과 투명도 등에 초점을 두고 명명한 경우, 개교(蓋膠)와 같이 아교를 끓여서 추출할 때 위 부분의 맑은 것을 지칭하여 명명한 경우, 조교(條膠)와 같이 나뭇가지 모양의 긴 막대형 교를 지칭하여 명명한 경우, 수 교(水膠)와 같이 물소로 제조된 교를 지칭하여 명명한 경우, 아교(阿膠), 광교(廣膠) 등과 같이 산동성 동아현과 광동 및 광서 지역에서 산출되는 교를 강조하여 명명한 경우 등 다양한 방식의 명칭 및 명명법을 출현시켰다.
우리나라의 경우 교 문화가 언제 어떤 과정을 거쳐 시작되었는지, 그리고 교에 관한 명칭이 어떠한 역사적 전개 과정을 거쳐 정착, 분화되었는지 분명치 않다. 다만, 삼국시대에 이미 狗膠, 糜鹿膠 등 몇몇 종류의 교를 출현시킴으로써 교 문화의 일정한 토대를 형성했다. 일본 정창원에 소장된 ‘신라양가상묵(新羅楊家上墨)’, ‘신라무가상묵(新羅武家上墨)’ 등도 신라에 서의 교 제조를 상정케 한다. 아울러 아교, 미록교(糜鹿膠) 등의 명칭 출현으로부터 중국식 명명법 수용의 일면도 읽게 한다. 이러한 양상은 고려시대도 지속되어 아교, 녹각교, 黃明膠, 白膠, 槐膠 등 보다 다양한 교 명칭을 출현시켰으며, 아울러 우피 (牛皮), 나피(騾皮) 등 제조원에 관한 기록 역시 보다 다양화, 구체화했다.
조선시대의 경우 고려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는 다종, 다양의 토대 위에서 교 문화를 전개했으며, 우피교, 녹각교, 마피교 (馬皮膠), 여피교(驢皮膠), 민어교, 석수어교(石首魚膠), 연어피교, 오교(螯膠), 황교(黃膠), 봉취교(鳳嘴膠), 어타(魚駝) 등 10여 종이 넘는 교를 제조했다. 여피교는 당나귀 가죽으로, 민어교와 석수어교는 각각 민어와 조기의 부레로, 오교와 황교는 커다 란 게의 딱지와 집게발로, 어타는 바다고기나 모래무지의 뼈로 제조했다. 특히 어타의 경우 재료를 뽕나무 잿물과 섞은 후 뽕 나무를 태워서 가열, 제조함으로써 다소 특이한 제조법도 출현시켰다. 게다가 그릇 모양의 틀에 교의 액을 넣어 굳힌 후 그릇 을 만들거나 혹은 편으로 만들어 물건을 만드는 데 사용됨으로써 소용처 역시 특이한 면모를 내보였다. 뿐만 아니라 난교(鸞膠)와 같이 거문고 등의 줄을 잇는 특수한 접착제도 출현시켰다.
막대형 아교 황갈색의 반투명 녹각교 어교 제조용 민어 부레
조선시대에는 교의 생산 지역도 상당히 광범위했다. 우피를 위주로 한 아교의 생산은 전국 각지에서 전개했으며, 특히 중 앙의 군기시와 선공감 등에는 아교장을 두어 생산을 전문화했다. 해산물을 위주로 한 어교 역시 충청, 전라, 경상, 경기, 황해, 평안, 함경 등 각도의 바다 및 강 인접 상당수 지역에서 생산되었으며, 녹각교 역시 충청, 경상, 전라, 강원, 평안 등 광범위한 지역에서 생산되었다.
조선시대 교는 약재로서 상당량이 소비되었지만 채색과 포수 등을 비롯하여 병기 및 목기 등의 제작 과정에서 필요로 하는 접착제로 보다 많은 소비가 이루어졌다. 일례로 1901년 의정부찬정 택지부대신서리 이용익이 의정부의정 윤용선에 게 진연 준비 과정에서 각종 기물의 채색에 필요한 아교를 청구한 바 있는데, 수량이 935근에 달했다. 이들이 모두 채색을 위해 사용된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지만 함께 청구한 안료의 양 역시 천여 근에 이르고, 안료와 동일한 항목에 포함시켜 청구서를 작성하고 있기 때문에 상당량이 채색에 사용된 경우였다. 1902년도 고종의 60세 생일 진연을 위해 의정부찬정 탁지부대신 김성근이 의정부참정 김규홍에게 청구한 아교량 역시 469근에 이르렀으며, 함께 청구한 안료량 역시 수백 근에 달했다. 특히 왕실 초상화의 어용에는 내의원에 있는 최상품 아교를 주로 사용했으며, 대부분 약재로 소비된 녹각교 역시 왕의 명정과 재궁 등에 금분으로 글씨를 쓰거나 대렴 과정에서 관 표면에 분채 장식을 할 경우 내의원에 있는 최상품 녹각교를 가져다 사용했다.
조선시대에는 교 종류의 확대뿐 아니라 교 관련 기록도 수천 건에 이를 정도로 크게 증가했다. 고려시대 몇 건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기록 문헌 종류도 고려시대 2∼3종에서 수십 종으로 확대되었으며, 특히 관찬서인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 기」, 「비변사등록」, 「의궤」, 「각사등록」, 각종 지리지 및 법령자료 등을 통해 공납지역, 유통량, 소용처 등과 관련된 내용을 비 교적 상세하게 기록했다. 아울러 어교는 각 군현의 궐공 항목에, 아교와 녹각교는 각 군현의 약재 항목에 분류, 분정함으로써 수취 체계 역시 보다 체계적으로 관리되었다. 이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교가 국가적 관심을 받는 물품의 하나로 등장했음을 나타내주는 동시에 교 문화 발전의 상당 부분이 국가에 의해 주도되었음을 시사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교 문화 발전이 다종, 다양의 토대 위에서 실질적 발전 단계로 진입했음을 말해준다.
“지천년, 견오백(紙千年,絹五百)” 한지의 성지, 전주 흑석골!
김 도 영(재)한국전통문화전당 원장/문화재학박사)
“지천년, 견오백(紙千年,絹五百)”, 이 말은 한지에 작업을 하면 천년이 가고, 비단에 작업을 하면 오백년을 간다 는 의미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조선의 종이는 중국 사신들이 다투어 받기를 원했고, 그중에 으뜸은 전주한 지이다.”는 기록이 나올 만큼 전주는 최고의 종이를 생산했던 곳이다. 전주에 위치한 전라감영에는 한지를 제조 하는 ‘지소’라는 곳이 있었다. 조선시대 한지 제조와 제도는 “1415년(태종 15)에는 국영 제지공장이며 종이제조 사무담당기구이기도 한 조지소(造紙所)가 설치되어 제지기술과 합리적 생산관리에 관한 일이 맡겨지고 지질(紙質)의 개량과 생산원가의 절하를 위한 노력이 경주되었다. 지방공장에는 모두 698인의 지장이 각 도에 소속되 어 있었다. 그리고 이 제지기술자들은 법적인 우대를 받도록 규정되어 생활보장을 받는 특전이 부여되었다.”(출 처: 한국학중앙연구회)고 한다.
전주한지의 우수성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하며 다양한 용도로 활용된다. 특히 보존용지로써 특수성 을 인정받아 프랑스 루브르박물관 문화재복원용지로 선정되었고, 이탈리아 국립보존복원 중앙연구소의 복원용 지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정부에서는 2024년도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 등재 신청목록으로 선정하였 고, 2026년에 최종 확정될 것에 대비하여 전통한지의 생활화 및 시설 구축 등을 준비 중에 있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에 맞춰 전통한지의 성지라고 할 수 있는 전주시는 작년 5월 23일 전주시 완산구 서서학동 흑석골에 한국 전통문화전당 <전주천년한지관>을 개관하였다.
옛 지명에 ‘돌이 반, 흙이 반’이라 해서 ‘반석리’라고 불리었던 서학동(동서학동, 서서학동)은 산자락에서 검은 돌이 많이 나오면서 대중적으로는 ‘흑석골’로 불리우게 되었다. 흑석골은 주변을 감싼 주변 산 위 동굴에서 시작 된 풍부한 물줄기가 골짜기를 따라 큰 폭의 낙차를 만들며 전주천까지 흘러갔고, 흑석골 동남쪽 뒤로는 보광재 가 있는데 이 보광재는 옛날 완주군의 구이면과 임실에서 전주로 통하는 고갯길로써 물자를 이송하고 행인들의 지름길 통로로 이용한 중요한 길이다. 이 길은 한지 제조의 주원료인 닥나무를 재배하는 임실로 뻗어 있었고, 인 근에는 생산된 한지를 전국의 상단에게 유통·판매할 수 있는 남부시장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러한 가치를 인정 받아 현재 보광재는 전주시에서 미래유산으로 지정하여 사라지지 않도록 그 흔적을 남겨놓고 있다.
이처럼 한지 생산을 위한 최적의 요건을 갖춘 흑석골이 한때 ‘한지골’이라는 별칭으로 명성을 드높일 때가 있 었다. 해방 이후 흑석골에도 점진적으로 거주민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는데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인근 지역의 피난민과 이주민들까지 흑석골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그 중 지공들이 다수 있었다고 한다. 1950년대 당시 전국적으로 규모를 갖춘 제지공장이 많지 않았는데 흑석골에는 ‘전주제지’가 이전부터 한지를 생산하고 있었다. 이후 1960년대 들어서 제지산업이 급속도로 성장하였고, 흑석골에 지공들이 하나둘씩 모여들면서 중소규모의 한지생산 공장(가내수공업 포함)이 단지를 조성하게 되었고 ‘전주의 산업지대’라고 할 정도로 흑석골이 번성하
게 되었던 것이다. 1980년 초반까지 청조제지, 문성제지, 문산제지, 호남제지 등 약 20~30여개의 한지공장들이 성업하였다. 당시 제지업 분야에서는 대한민국의 최대 규모였다.
한국전통문화전당 전주천년한지관이 발간한 『돋음집』 내용에 보면, “흑석골에서 흐르는 물은 ph 7~9를 넘지 않은 중성을 유지하였기 때문에 양질의 한지생산에 적합했다고 한다. 종이가 누렇게 변색하는 이유는 산성 성질 을 유지하기 때문인데 전통한지는 중성지의 성질을 띠어 오래 간다고 한다. 중성화가 종이 보존에 중요한 역할 을 하는 이유다. 즉 흑석골은 자연 굴에서 발원하는 풍부한 수량의 물, 경사진 지형으로 인해 생긴 큰 폭의 낙차, ph 7~9를 넘지 않는 종이생산에 적합한 물성 덕분에 전국 최대·최고의 한지를 생산 할 수 있었다.”고 서술되어 있다. 그러나 전국 최대 규모의 한지생산지인 흑석골이 1980년대 시대의 흐름에 따라 환경에 관한 정부의 정책 과 1990년 후반 중국산 저렴한 기계지가 대거 수입되면서 국내 한지생산업체들은 가격경쟁력에서 밀리면서 어 쩔 수 없이 기계지를 생산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전통 전주한지의 생산은 급감하였고 설 자리를 잃어갔던 것이 다. 또한 흑석골의 한지공장들은 표백제의 정제되지 않은 오폐수 처리로 인해 환경오염의 주범이라는 지적을 받 으면서 전주시 팔복동에 위치한 산업단지 내로 대부분 자리를 옮겨가야만 했다. 이렇게 한때 흑석골이 아닌 한 지골로 불리었던 찬란한 명성은 사라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시대변천적 상황을 고려하고, 옛 명성을 회복하기 위해 <전주천년한지관>이 흑석골에 개관하 였고, 전주한지를 전통기법으로 생산하는 기술 및 소재(원료)연구를 주요업무로 하면서, 전주한지의 복원 및 계 승, 후계자 양성 및 한지문화의 확산을 위한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닥무지 행사를 통해 ‘한지골’ 이라 불리우던 시절 한지공장에서 근무하셨던 마을 주민들과 직접 닥무지 작업을 하며 작은 마을 축제를 열었 다. 또한 주민들과의 소통을 통해 흑석골이 한지골로써 자리했던 스토리를 채집하고 알리기 위한 초석을 다지고 있다. 이제는 흑석골에 대한 혁신적이면서 큰 마스터플랜이 요구되는 시점이라 생각된다. 세계를 대표하는 최고 의 종이인 전주한지 생산단지가 재조명 받고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우리 국민들이 찾고, 세계인이 자발적으로 찾아오는 세계종이의 성지로써 ‘한지골’이라는 명성을 드날리기를 소망한다.
기억의 반추(反芻)를 통해 나타난 ‘내면의 섬’ 표현 연구
이 지 희(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학과 동양화전공)
박사논문 국문초록
본 초록은 본인작품 ‘내면의 섬’ 연작을 대상으로 주제적 특징과 상징성, 나아가 조형적 가치를 분석한 작품 연구논문이다. 따라서 ‘내면의 섬’의 주제적 바탕을 이루는 기억의 반추에 관한 이론적 배경 연구를 토대로 창작 의의와 동기, 표현에 따른 조형성 등을 분석하였다.
기억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역사적으로 자주 등장하는 주제이며, 특히 동양에서는 경험을 중시하는 심미 체험의 기반이 되기도 한다. 인간의 삶에서 기억은 존재 의식의 근원적 의미를 일깨워주는 핵심 개념이자 역사 적으로 예술과 문학, 철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연구되는 주제이다. 끊임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겪는 모든 경험은 어떠한 형태로든 머릿속에 혹은 마음속에 남아 있다. 이러한 경험은 시간의 간격을 두고 사건에 의해 필요에 따라 떠올려지거나 혹은 생각지도 못한 상태에서 예고 없이 떠올려진다. 이렇듯 기억은 이미지의 잔상 이거나 혹은 감정이 동반된 형태로 소환되어 다양한 양상으로 떠오른다. 다양한 기억의 양상 중 본인은 잊히지 않는 특정 시기에 대한 감정이 마음속 찌꺼기처럼 남아 끊임없이 반추되는 현상과 마주하는 경험을 한다. 본인 의 특정 시기는 잦은 이주로부터 겪은 이방인과도 같은 삶인, 즉 그 어디에서도 속하지 못한 자신의 처지로부터 스스로 고립되었던 시기이다. 이렇게 내면에 생성된 불편한 감정을 인지하고 존재의 질문으로 대면하는 일련의 과정을 ‘내면의 섬’ 연작의 창작 동인으로 삼았다.
먼저 ‘내면의 섬’의 주제적 특징이 되는 기억에 관하여 동·서양의 심리학적·철학적 관점을 기반으로 비교 분석하였다. 다양한 기억의 성격을 나누어 감정으로 떠올려지는 현상을 프로이트(Freud Sigmund, 1856-1939) 의 ‘이물질’ 개념으로, 또한 기억이 반추되는 개념을 수잔 놀렌-혹스마(Susan Nolen-Hoeksema, 1959-2013) 의 ‘반추적 반응양식(ruminative response style)’이론으로 분석하였다. 이를 통해 기억의 반추는 부정적인 요소 를 끊임없이 생산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편 생산된 부정적 요소가 정화되는 근거로 한유(韓愈, 768-824)의
「송맹동야서(送孟東野序)」에 거론된 “마음에 맺힌 불평은 말할 수밖에 없다”는 ‘불평즉명(不平則鳴)’ 이론을 빌려 논하였다. 또한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 1884-1962)의 ‘의식작용’과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1905-1980)의 ‘상상의식’을 통해 기억을 존재론적 관점에서 이해하고자 했다. 기억과 반추의 근본적인 원인을 밝히고 나아가 스스로 자기 해소에까지 이르는 본질적 존재 질문에 대한 자각에 도달할 수 있었다.
‘내면의 섬’ 연작의 이론적 특징으로는 불편한 감정기억을 스스로 정화하기 위한 가공과 ‘섬’으로 구축되는 배 설 과정을 중심으로 고찰하였다. 이를 기억이 예술적 창작물로 변환된다는 ‘비흥(比興)’의 개념에 대입하여, ‘비’ 는 감정기억이 일으켜지는 작품의 동기를 의미하고 ‘흥’은 마음속 불편이 예술 창작물로써 변환되는 것으로 논
하였다. 이처럼 창작물로 변환된 기억을 정화의 의미로 카타르시스(Catharsis)에 대입하여 분석하였다. 이는 자기 해소이고, 심리적 초월을 의미하는‘자기화’의 과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기화’된 ‘섬’은 끝없이 펼 쳐진 내면세계에 생성되는데 이를 장자(莊子)의 ‘무하유(無何有)’를 빌려 깊이를 알 수 없는 초자연적 바탕인, 즉 우주적 근본원리인 도(道)이며 그곳에서 내유(內遊) 하는 것이 ‘내면의 섬’ 창작 가공과정임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이론적 분석을 기반으로 조형적 특징인 ‘1차 그리기’, ‘2차 오리기’, ‘3차 붙이기’의 가공은 자신의 그림을 오리는 행위로 부정성을 제거하는 상징적 의미이며, 새로운 화면상의 응집체로 표현되는 것이 행위의 핵심이 된다. 이렇게 조형화 과정을 거친 작품은 ‘신화 속 인물’과 ‘혼돈의 동산’, ‘심해(深海)수족관’으로 분류 할 수 있다. 이 세가지 시리즈에 공통된 주제적 특징으로는 신화(神話)적 차용을 들 수 있다. 여기서 등장하는 신(神)은 억압된 기억으로부터 구원해줄 구원자로 설정한 나만의 신(神)이다. 때문에 억압된 기억의 해체와 조립 과정을 통해 조성된 ‘내면의 섬’의 신화적 의미는 본인의 결핍과 극복 의지가 반영된 정신이 투영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본인에게 있어 기억은 감정에 따라 다양한 형상으로 변화되어 왔으며 반추된 기억은 ‘내면의 섬’ 조합으로 나타났다. 때문에 조형화된 ‘내면의 섬’은 본인 그 자체이며 정화된 ‘나’를 상징한다. 나아가 개인 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나’까지 관계하며 이상적 모습의 ‘나’를 소망하게 한다. 즉 ‘내면의 섬’은 자신의 비극을 스스로 정화하는 예술적 심미체험이 작품에서 표출된 것이고, 실제로 도달할 수 없는 구원의 내면세계를 형상화한 것이다. 이렇듯 본 논문은 ‘내면의 섬’ 작품연구를 통해 스스로 정화된 ‘자기화’의 단초가 되고 앞으로 의 작품 활동에 확장성을 위한 기초를 마련하는 데 의의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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