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현(고석산방 대표)

Q. 표구사를 개업하셨을 때가 70년대 초반이라고 하셨는 데, 그때 당시의 전라북도의 시대적 배경은 어떠했는지요?

시기적으로 어려운 때였죠. 전쟁 끝나고 모든 생활이 어렵고 마찬가지로 표구사 일로 생활을 하기가 힘들었죠.

한 달에 표구도 몇 개정도 만 할 뿐…. 액자제작은 없고 결혼할 때 해가는 동양자수만 몇 개 들어올 뿐이었죠.

Q. 장황(粧潢-비단이나 두꺼운 종이를 발라서 책이나 화첩, 족자 따위를 꾸미어 만듦.) 작품에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이자 작품의 마지막 단계라고 생각합니다. 광원 김대현 대표님은 지난 56년간 변치 않는 장인정신으로 장황의 명맥을 잇고 계시는 데, 어떤 계기로 이 일을 시작하게 되셨는지요?

누나 집에서 자수공장을 했어요. 그때만 해도 여자아 이들은 초등학교만 나오면 수를 배우고 결혼준비를 할 정도 로 특별한 직업이 없었어요.

자수공장에서 2-30명 정도 아이들이 자수를 놓고 일하는데 그 공장에서 병풍을 맡기다가 비싸니까 직접 배워서 병풍을 만들었어요.

표구 일에 조금씩 관심을 가지다가 1960년도부터 본격적 으로 시작했어요. 67-8년도에는 기업들이 달력을 만들 때 작가 들 그림을 사서 사용했는데 그 그림들을 가지고 표구를 많이 했어요.

그러다가 1971년에 제대 할 때쯤 누나가 완산서와문화사 라는 표구사를 운영해서 기술자로 일을 배우고 작업하기 시작했어요. 73년도쯤 독립하여 전동 옆 고석산방을 개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럼 그때 당시 활동했던 작가분들 기억나세요?

석정 낭궁훈, 벽천 나상목, 석천 황욱, 현림 정승섭 선생님등 이 기억에 남아있어요

70년대 후반에는 그 당시에는 침체된 분위기로 활발하게 활동하는 화가들이 많지 않았어요.

근대 6대 화가들의 작품이 저렴한 가격으로 나올 정도로 침체되어 있었죠.

그 시기에는 생활이 어려워서 예술작품을 돈을 주고 사고 파는 환경이 안되었죠.

Q. 장황은 숙련된 기술과 정성이 요구되는 전통 방식의 배접 과정인데요, 장황일을 하시면서 어떤 점이 가장 어렵 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이 일 자체가 다 어려워요. 배접(작품 뒤에 종이를 포개어 붙이는 일)할 때 상한 먹을 사용한 작품은 사정없이 번지기도 하고 채색화 같은 경우 진한 채색화를 배접할 때 색이 번지는 경우도 많죠. 또 큰 작품을 할 때 풀에 젖은 종이 가 무거워져서 들고 옮기는 것이 힘들 잖아요, 그런 과정들이 보통 신경을 쓰지 않고서는 힘들어요. 정확하게 먹의 번짐을 파악해야 하고 정성을 들여야 해요. 긴장한 상태에서 하지 않 으면 쉽지 않죠. 작품의 제작 과정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배접 이라고 봐요. 배접 과정에서 번지고 상하면 아무리 다른 치장 을 한다고 해서 다 소용이 없는 거죠.

장황 일의 전망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장황이라는 것은 작품을 돋보이게도 하지만 작품을 오 랫동안 좋은 상태로 보존할 수 있게 하는 가장 중요한 과정이 라고 생각해요. 이런 중요한 장황 일이 전통적으론 매우 가치 있는 일이지만 변화하는 현시대에는 장황을 배워서 업으로 생활하기에는 어렵다고 봐요. 그렇기 때문에 취미로는 가능 하지만 장황사라는 직업이 서서히 사라질 것 같다는 느낌이 들죠.

Q. 지금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배첩장 신청을 하셨는데, 배첩장이 되면 앞으로 어떤 계획이 있으신지 말씀해주세요.

오래전부터 생각해왔던 건데요, 장황 일에 관심이 있는 분들에게 취미활동으로 하실 수 있도록 취미반 수업으로 기술 을 전수해주고 싶은 마음입니다. 저도 우리 후손들에게 이런 문화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남겨주고 싶습니다.